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수학으로 푸는 정치는 감동이 없다.

8곳에서 치뤄진 7.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한나라당 5곳, 민주당 3곳의 승리결과를 놓고 여러가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선거가 치뤄지기전에는 민주당이 5곳, 한나라당 1곳, 자유선진당 1곳, 창조한국당이 1곳을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5곳 승리가 본전이고, 6곳 이상 이겨야 승리라는 얘기다.

3곳 승리라면 참패라 할만하다.

 

선거 이후 민주당의 첫 반응은 "후보 단일화가 늦은게 패착"이라는 얘기가 흘러 나온다.

 

진단을 잘못하면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과연 '후보단일화'가 만병통치약일까?

 

국민들이 왜 민주당을 찍어야하고, 왜 야권단일화가 필요한지 알고있다고 생각하는가?

단지 숫자상으로, 머리수 상으로 당원숫자만 합해도 이기지 않을까하는 수학적 논리로 접근하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 오류는 노무현 정권말기에도 있었다.

호남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수도권 20~40대, 전국의 민주세력과 노사모 인원이면 대선을 승리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설픈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고, 권력 핵심에 있던 전략가라는 사람들의 발언이었다.

 

한번 민주당이면 영원한 민주당 지지층이라는 생각이 숫자상 오류로 빠지는 원인이다.

한나라당 텃밭이라는 강원도에서 민주당이 선전한 이유도 그렇고,

충청남북도에서 철저히 외면 당했던 한나라당이 살아난 이유를 살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잘못하면 사정없이 혼내기도하고, 잘하면 격려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영원한 지지는 없다는 것이다.

 

숫자 정치는 예전부터 계속되었지만 결정판은 3당합당이 아닌가 싶다.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시작된 노태우정권 시절은 정치권 모두가 당황하는 시대였다.

그동안 여당의 일사천리 정책 집행과 극단적인 야당의 반대로 진행되던 정국이 아닌 새로운 정치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번번히 국회에 잘못이 잡힌다는 생각에 집권여당(민정당)은 내각제를 고리로 충청권을 기반으로한 신민주공화당(김종필), 부산경남을 기반으로한 통일민주당(김영삼)과 3당 합당하여 거대여당을 출현 시킨다.

일거에 전체 국회의석 299석의 2/3가 넘는 218석을 확보한 거대여당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숫자상 엄청난 권력은 오만함을 불러왔고 다음 14대총선에서 149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맛본다.

그러한 3당합당의 오만함에 '이의 있습니다'하고 반기를 든 노무현의원이 훗날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도 그 때 뿌려진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에 찬사를 보낸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바로 다음날 그도 숫자정치를 염두에 두고 YS시계를 차고 상도동을 방문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는 시련을 겪게된다.

 

성공적인 연합이라 불리는 DJP 연합.

충청과 호남의 1+1 결합의 승리로 보지만 이는 1+1=2가 아닌 3, 5의 결과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대선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아직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보수층을 원조보수 인물들이 결합되므로써 안심시키고 지지층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현재 상황을 조금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국민들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열했다 합친 것도 잘모르고 관심도 없다.

민노당이 진보신당과 분리되고, 다시 합당 노력을 하는 것도 관심 없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국민참여당의 활동은 알지도 못한다.

 

정치공학적으로 진행되는 정국에서 1+1+1의 단일화로 3 이상의 효과를 내겠다는 것은 도박을 해서 돈을 따겠다는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반사이익을  얻고자한다면 실패만 거듭될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의 전당대회가 좋은 예다.

'모래시계'검사로 개혁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홍준표의원이 본인의 이미지를 살려내지 못하면서 안상수의원에게 패하고 만다.

본인의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거막판 안상수의원 흠집내기에 전념할 결과다.

조직에서의 패배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정당의 전당대회를 치루다 보면 조직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기본 조건일 뿐이다.

정당의 대의원 정도되면 정국의 흐름을 어느 정도 꿰뚫고있는 사람들이다.

희망을 제시하면 표는 오게 되어있다.

 

노무현후보도 조직으로 따지면 당시 정권2인자로 까지 불리던 이인제후보에게 상대도 되지않았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제시했고, 감동의 역전을 이뤄냈다.

 

민주당+민노당+진보신당+창조한국당+국민참여당=5인가?

 

각자의 이념과 정책, 이유에 의해 창당된 정당들이 선거 때 마다 왜 연합하고 연대해야 하는지?

 

차라리 모두 합당하지 왜 선거 때마다 그래?

 

모두 단결해서 심판에 매달릴 정도로 현 정권이 국민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가?

 

이러한 국민들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호남인구 숫자+노동자 숫자+노사모 숫자+진보세력숫자+시민단체숫자=승리를 염두에 둔 결합이 아닌지 반성해 볼일이다.

 

수학으로 푸는 정치는 재미가 없다.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정치는 숫자의 결합이 아니라 1을 갖고도 10을 만들기도 하고 20을 만들기도 해야된다.

그러기위해서는 야당 스스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만들어줘야한다.

 

왜 야당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정권 심판과 반대는 야당 본연의 임무일 뿐이다.

감동의 정치를 실현하지 않는 이상 야권의 길은 멀고 험할 뿐이다.

 

"The Long and Winding Road"

The wild and windy night
That the rain washed away
Has left a pool of tears
Crying for the day.
Why leave me standing here?
Let me know the way.
거칠고 험한 밤, 비에 씻겨 나가고
눈물만이 그득하니
하루 종일 울음에 젖어
그대, 왜 나를 이곳에 남겨두고 떠났는가.
그대에게 이르는 길, 내가 볼 수 있기를.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영웅 부재의 시대

여름 휴가철이 겹쳐 7.28 재보궐 선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잠재적 정권2인자(?) 이재오위원장이 출마한 은평을의 경우 관심 지역으로 떠오를만 한데, 크게 이슈화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슈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재오위원장의 전략이 끝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이재오위원장이 당선된다면, 현재의 실질적 정권2인자 자리를 놓고 엄청난 권력 다툼이 일어날 가망성이 크다.

여, 야 정치인 사찰 대상자들을 보면 현재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과거정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에는 항상 현안이 있게 마련이다.

집권 여당에서는 권력 다툼을 하면서 주요 정책을 집행해나가고,

야당에서는 이념과 생각이 다른 주요 정책들에 대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다.

 

여당과 야당의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얼마만큼 차이를 조율해 나가느냐는 것만이 정권에 따라 다를 뿐이다.

 

'4대강사업'이나 '세종시' 등은 주요 현안이지만  온 국민들이 그 중요성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성희롱 사건이나 정치 사찰 문제 등이 오히려 말초적으로 흥미있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권력 주변의 비리에 대해 욕하면서 구경하는 측면이 있지않나 싶다.

이러한 양상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만 키울 뿐이다.

 

정치에 희망이 사라지면 나라발전에 도움이 전혀 안된다.

 

대통령 임기도 반환점을 돌아 이제 2년 뒤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그런데 여, 야 정치지도자를 둘러보면 국민에게 희망을 줄만한 뚜렷한 주자가 없다.

 

그동안 대권을 잡거나 도전했던 정치지도자들은 공과를 떠나서 어찌되었든간에 업적, 성과라는 것이 있었다.

손에 잡히는 성과...

중요하다.

 

이승만-독립운동과 건국

박정희-경제개발

김영삼-민주화

김대중-민주화와 남북평화

노무현-지역균형발전

이명박-성공한 CEO이미지, 청계천과 시내버스

 

많은 논란은 둘째치고 일단 다수 국민들의 정치인 이미지만을 고려했을 경우의 평가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잠재적 대선후보군 중에 손에 잡히는 성과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없어 안타깝다.

 

국민들이 희망을 가지려면 뭔가 조그마한 성과라도 보여줘야한다.

정치 현안에 몰입되서 다툼을 하고, 이기는 것이 아닌 국민들이 원하는 생활현장의 고민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자리, 교육, 보육, 복지 문제들은 너무나 시급한 당면 문제들이지만 정부의 정책들이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지방선거이후 각 지자체들마다 일자리를 몇 만개씩 만든다는데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는 층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정작 노동부나 지자체에 사회적기업이나 일자리 창출사업에 대한 문의를 하면 담당부서를 서로 떠넘기는 형국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교육, 보육, 복지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하면 토론의 주체는 각 시설이나 기관의 이해관계자나 학자 위주로 진행된다.

그러면 기관의 수익이나 편익을 위한 토론회로 그치게된다.

정작 국민들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보육정책 토론회를 하면 주로 시설의 질을 높이는 문제, 교사지원책 등이 논의된다.

물론 좋은시설과 좋은 교사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선은 당장 아이들을 맡길 곳이 부족하다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친정집 근처로, 시댁 근처로 이사를 하든지, 그마저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맞벌이 부부들의 현실문제 부터 해결해야 한다.

보육문제에 대한 부분은 중요해서 나중에 따로 포스팅해보고자한다.

 

국민 대다수가 필요로 하는 정책에 대한 대책은 여러 곳에서 발표되고 있다.

정부부처나 여, 야 각 정당의 정책위원회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살펴 보면 몇 년 전에 발표한 내용들을 다시 짜집기해서 발표하는 것들이 많다.

 

이러니 국민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고 탁상행정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현장에서 실현하는 정책이 생활정치의 시작인데 이를 실천하는 정치인이 드문 것이다.

 

생활 정치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은 지역에서라도 모범사례를 만들어내면 된다.

몇몇 곳에서 성공을 거두면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아무런 성과도 갖고 있지 않는 여, 야 정치 지도자들은 정쟁과 정치공학에 몰두 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생활정치의 현장에서 역사를 만들어내야 한다.

 

1년을 투자해서 성과를 만들어낸다면 국민들에게 새로운 영웅으로 부상하지 않을까 한다.

 

대권에 욕심있는 분들이라면 관심을 갖고 실천할 일이다.

 

사실 정치현안에 거리를 두고 생활정치를 묵묵히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않은 일이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40대 기수론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시대 정치에 대항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는 시대도 끝났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영웅의 탄생!

 

대권주자라면 한 번 해볼만하지 않은가?

2010년 7월 7일 수요일

4대강 사업에 대한 단상

인간이 곧 자연이며, 환경파괴는 인간에 대한 파괴다.

 

지리산을 끼고 섬진강이 흐르는 전남의 자그마한 자치단체 곡성에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압록’이라는 유명한 유원지가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3만여 평에 이르는 드넓은 은빛 모래백사장이 펼쳐져 여름 피서지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참게탕 식당 몇 곳이 운영되는 그저그런 곳으로 변했다.

 

군에서 상류에 골재채취를 허가한 이후 모래사장이 사라져 버리고, 아울러 관광객들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부 물놀이를 즐길 정도의 관광지 역할은 하고 있지만 옛 명성을 찾으려면 한참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서울을 흐르는 한강 역시 광나루, 뚝섬유원지의 모래사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던 시대가 그리 오래전 얘기가 아니다.

사진은 무척 오래된 것 같은데, 1970년대까지는 물놀이를 즐겼던 것 같다.

 

홍수를 예방하고 올림픽을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시멘트 일직선을 만들어 버린 한강은 아직 온전히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흥시설이 늘어나고, 깨끗해진 것이 발전한 것 아니냐면 할말은 없다.

 

위 두가지 사례는 개발논리에 의한 자연파괴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로 다가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그 자연의 일부분이며 이 사실을 안다면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을 것이다.

 

강은, 살아 있는 강은 굽이굽이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이런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을 흐르지 못하도록 채워 놓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강이 아니다.

 

스님은 '소신공양'을 불사하고, 신부님들이 삭발투쟁에 나서고,

4대 종단의 주요 성직자들은 '4대강 살리기'를 꼭 저지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너무나 위험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표로 국민들이 심판하고, 주요 성직자들마저 나서는 이 시국에 대해 이명박대통령은 국민들과 소통해야한다.

그래야 나라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4대강 사업은 통상적인 치수사업의 범위로 축소하고,

국민들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홍수예방, 물부족, 수질개선, 일자리 창출의 명분이 과장되어졌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해명하는 자리부터 만들어야 한다.

 

4대강사업 예산으로, 수자원공사 예산을 포함해서 거론되는 9조2천억의 예산이면 국민들이 다른 복지 혜택을 받으며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2010년 7월 4일 일요일

영혼의 편지-반 고흐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고, 반감 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 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 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고통의 순간에 바라보면 마치 고통이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끝없이 밀려와 몹시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밀밭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예술은 고통 가운데 피어난다고 하지만, 모든 고통 받는 이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말씀하셨다. 시련은 대개 그릇을 찌그려 놓기 일쑤라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시련의 고통을 이겨내기가 쉽지않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통은 새로운 희망을 창조한다.' 등등의 말들은 위대한 성공자들의 말 일 뿐일 경우도 많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않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위대한 인물들이 역경을 이겨낸 길을 보면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불행과 광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흐의 영혼에 다가가도록 돕는 책이다.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자화상' 등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에는 지상의 고통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강렬한 색과 꿈틀대는 선들이 이끌어 가는 곳에 불행한 예술가의 우울과 신경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된 이 책에는 궁핍한 생활, 동생에 대한 부채감, 계속되는 발작으로 점철된 고흐의 불행한 삶이 고통을 견디며 영원을 꿈꾸는 위대한 영혼과 함께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화가들에게 농부, 광부, 매춘부와 같은 이들은 더럽고 추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보통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없거나, 번지르르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되었다.

가령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은 한가로운 농촌의 고요함을 드러내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흐는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포착하고 싶었다.

냄새가 나는 밭과 노동에 찌들어 거칠어진 피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역동하는 생명이야말로 고흐가 본 삶의 진실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한다.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반 고흐가 남기고 간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결론을 내렸다. 수도사나 은둔자처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아가기로."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과 인간 안에 넘치는 생명, 그 진실을 찾아 자신을 내던졌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게임 준비를 하던 때 이야기다.

성화봉송로 주변과 공항에서 종합운동장에 이르는 길가에 허름한 집들은 다 철거 되었다.

외국인들에게 깨끗한 거리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실천(?)이었다.

장애인들 역시 특별 관리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2008년 중국의 북경올림픽에서도 재현되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동양적 사고의 극단화라고 할까?

보기 싫은 것은 쓸어버린다는 사고방식?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뉴타운 개발...

깨끗한 개발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민들도 비용을 감당 못해 외곽으로 밀려 나가는 개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쪽이 높은 성을 쌓기 시작하면 한쪽은 소외감이 깊어진다.

그러면 사회통합은 어려워진다.

 

고흐가 전착했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

 

국민을 위한 정책이란 지금 국민들이 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한다지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왜 자금을 받지 못하는지,

보육지원을 한다지만 왜 사람들이 친정집 옆으로, 시댁으로 이사를 가야만 하는지? 그마저 맡길 곳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는지...

몇만개 청년 일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책상머리 정책이 아닌 국민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