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4일 일요일

영혼의 편지-반 고흐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고, 반감 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 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 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고통의 순간에 바라보면 마치 고통이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로 끝없이 밀려와 몹시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밀밭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림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예술은 고통 가운데 피어난다고 하지만, 모든 고통 받는 이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말씀하셨다. 시련은 대개 그릇을 찌그려 놓기 일쑤라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시련의 고통을 이겨내기가 쉽지않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통은 새로운 희망을 창조한다.' 등등의 말들은 위대한 성공자들의 말 일 뿐일 경우도 많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않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위대한 인물들이 역경을 이겨낸 길을 보면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불행과 광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흐의 영혼에 다가가도록 돕는 책이다.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자화상' 등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에는 지상의 고통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강렬한 색과 꿈틀대는 선들이 이끌어 가는 곳에 불행한 예술가의 우울과 신경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된 이 책에는 궁핍한 생활, 동생에 대한 부채감, 계속되는 발작으로 점철된 고흐의 불행한 삶이 고통을 견디며 영원을 꿈꾸는 위대한 영혼과 함께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화가들에게 농부, 광부, 매춘부와 같은 이들은 더럽고 추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보통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없거나, 번지르르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되었다.

가령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은 한가로운 농촌의 고요함을 드러내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흐는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포착하고 싶었다.

냄새가 나는 밭과 노동에 찌들어 거칠어진 피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역동하는 생명이야말로 고흐가 본 삶의 진실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한다.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반 고흐가 남기고 간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결론을 내렸다. 수도사나 은둔자처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아가기로."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과 인간 안에 넘치는 생명, 그 진실을 찾아 자신을 내던졌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게임 준비를 하던 때 이야기다.

성화봉송로 주변과 공항에서 종합운동장에 이르는 길가에 허름한 집들은 다 철거 되었다.

외국인들에게 깨끗한 거리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실천(?)이었다.

장애인들 역시 특별 관리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2008년 중국의 북경올림픽에서도 재현되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동양적 사고의 극단화라고 할까?

보기 싫은 것은 쓸어버린다는 사고방식?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뉴타운 개발...

깨끗한 개발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민들도 비용을 감당 못해 외곽으로 밀려 나가는 개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쪽이 높은 성을 쌓기 시작하면 한쪽은 소외감이 깊어진다.

그러면 사회통합은 어려워진다.

 

고흐가 전착했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

 

국민을 위한 정책이란 지금 국민들이 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한다지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왜 자금을 받지 못하는지,

보육지원을 한다지만 왜 사람들이 친정집 옆으로, 시댁으로 이사를 가야만 하는지? 그마저 맡길 곳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는지...

몇만개 청년 일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책상머리 정책이 아닌 국민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댓글 5개:

  1. 맞는 말씀이에요~



    요즘은 공무원이나 기자들이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경우가 많아서

    서민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모른다더군요.

    그러니 자기네 딴에는 머리를 짜낸다고 한 게 고작 책상머리 정책이고

    기사를 가장한 기업홍보, 관광지 소개고... 그런 모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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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해피플루 - 2010/07/05 07:41
    새로운 방식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려서부터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계층이 형성되면 정말로 사회가 불안해집니다.

    서로 소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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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위정자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데 과도한 역사적 소명의식, 선지자 의식이 문제입니다.

    그저 국민들 곁으로 내려와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747, 비핵개방3000 등이 그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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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멍 - 2010/07/06 00:50
    맞습니다.

    생활정치라고 외치기는 하는데 본질을 실천하는 정치인이 드문 현실입니다.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작은 것들인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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