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이런 한심한 청와대, 니들만 신종 플루 안 걸리면 되니!

일명 신종 플루, 신종 인플루엔자A(H1N1)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감염자수가 3000명을 넘어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도 대비책 마련에 비상이 걸렸단다.

청와대는 특히 이명박 대통령과 참모들 각종 내ㆍ외부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신종 플루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경호처를 중심으로 비상체제를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우선 이 대통령이 근무하는 청와대 본관은 물론 참모들이 근무하는 비서동으로 통하는 주요 출입구에 열 감지기를 설치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출입자들을 체크하고 있다.

 

이에 따라 25일 오후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한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참석자 전원이 본관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열 감지기 검사도 함께 받았다. 또 기자실이 위치한 춘추관 등 감지기가 아직 설치되지 않은 건물에서는 출입자를 상대로 일일이 체온계를 이용해 발열검사를 하기로 했다.

 

앞서 경호처는 지난 23일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에도 8대의 열 감지기를 설치하는 등 이 대통령의 외부행사에도 신종 플루 차단 대책을 별도로 시행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청와대 직원들 가운데 감염자가 나올 것에 대비해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확보하고, 직원들을 상대로 신종 플루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호처는 특히 이대통령과 접촉이 잦은 핵심 참모들에 대해선 특별히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와 함께 청와대는 신종 플루 진입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면역력이 약한 만 18세 이하 청소년과 영ㆍ유아 및 외국인의 경내 관람을 9월 1일부터 일시 중단키로 했다.

 

이상은 8월 27일(목) 문화일보 기사다.

신종 플루에 대한 대비책이란 것이 명박산성을 쌓아 청와대와 국민들의 접촉을 막는 것이다.

 

신종 플루의 확산세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일부 병원에서는 폐렴 예방백신인 폐구균백신을 신종 플루예방백신으로 속여 접종하고, 대형병원들은 타미플루 등의 항바이러스제 확보 경쟁이 치열해 지고 있다.

 

신종 플루가 올가을 대유행하게 되면 전체인구의 20% 감염 발생, 입원환자 20만명, 사망 2~4만명(0.04~0,08%) 정도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시급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정부는 환자발생과 사회경제적 부담 등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고, 현장점검을 지속해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만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으면 되는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6ㆍ25전쟁 당시에 이승만 정권은 방송으로는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 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갔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정부 요인들 중에서도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500~1,500여 명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피난민이 사망하였다.

한강철교 폭파로 밀려오는 북한군을 잠시 저지할 수는 있었는지 몰라도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희생된 많은 국민은 하늘에다 원망하며 한탄해야 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45분에 벌어진 일이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야반도주하는 대통령...!

 

 

청와대의 이번 조치들을 보면서 이승만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앞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피해를 감안하면 국무총리를 대책단장으로 임명하는 범정부기구를 조속히 운영해야한다.

 

방역현장과 역학조사 기관, 병원 실태 등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대책을 내놓아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 방문자를 차단할게 아니라 대통령이 앞장서 방역현장을 진두지휘한다면 지지율이 엄청 올라갈 텐데...

 

우씨! 이건 가르쳐주면 안되는데...

국민건강이 우선이라 가르쳐준다...

 

지금 사는 게 행복하십니까?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있다.

우골은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형이 내다 판 소의 유골이라는 뜻으로, 학생의 등록비를 재원으로 하여 학교건물을 세웠다고 해서, 대학을 빈정대어 이르는 말이다.

이는 대학을 흔히 상아탑(象牙塔, Ivory Tower)이라고 부르는 것을 빗댄 말이다.

‘Ivory Tower’는 1869년 프랑스어(tour d’ivoire)에서 유래된 말로, 현실과 거리가 먼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개념이다. 대학 연구소, 강의실 등을 총칭한다.

 

 

과거 우리의 부모님들은 소를 팔거나 논밭을 팔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힘든 농사짓지 말고, 도시에서 성공하라고...

하지만 이제는 거꾸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의 터전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전체 귀농·귀촌 인구는 2218 가구로 7년 만에 3배 가까이 크게 늘어났다.

그들 가운데에는 고학력자, 젊은 세대가 귀농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그들은 왜 도시를 떠난 것일까?

 

어제 저녁 SBS 뉴스추적에서는 ‘도시를 떠난 사람들 -2009 新귀농보고서’편을 방영하였다.

충남 서천군의 귀농 공동체 ‘산너울’마을의 모습과 귀농실패 사례 등을 보도하였다.

 

충남 서천군 ‘산너울 마을’에는 34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김한솔 씨(36)는 1년 전만 해도 한 게임회사에서 잘 나가던 억대 연봉자였다.

신문기자 출신 고금석 씨는(59) 평소 취미였던 연극 연출일 등을 하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는데...

각기 다른 사연으로 34가구가 모여 사는 집단 공동체 ‘산너울 마을’의 사람들!

그들이 꿈꾸는 삶과 돈 주고도 사지 못 할 행복의 비결은 무엇인가?

 

귀농사연의 첫 번째는 건강인 것 같다. 암과 같은 질병과 자녀들의 아토피 등등 도시에서의 삶으로는 치유되기 어려운 병을 고치러 내려온 경우가 많다.

둘째는 가족 간의 유대문제인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도시의 삶은 가족 간의 대화부족을 가져오고, 이는 가족 간의 정이 단절되는 결과를 빚기도 한다. 이를 치유하는 방편으로 농촌생활을 시작...

셋째는 은퇴 이후의 제2의 인생 시작이고...

 

엘리트들의 달라진 귀농 정착기도 보여줬는데...

박범준, 장길연 부부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지만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무주 산골로 들어갔다. 이들 부부는 몇 번의 이사 끝에 지금은 제주도에 터를 잡고 작은 도서관과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남해에는 18명의 원예가들이 집단 귀촌해 ‘원예 예술촌’ 관광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

이처럼 新귀농자들은 농사짓는 일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일과 전원생활을 동시에 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新귀농의 성공 비결은?

최근 귀농행렬이 이어지면서 지자체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각종 지원 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섣불리 귀농에 나섰다간 실패하기 마련이다. 현지 주민들과의 갈등, 무작정 귀농했다가 농사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착에 실패하는 경우 등 전문가들은 실제로 10명 중 7명은 귀농에 실패해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귀농에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TV를 통한 귀농의 모습을 보다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과연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단순히 시골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마음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위해서?

단지 선행학습을 하고 있을 뿐인데...

맞벌이로 종종거리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내맡긴채?

 

많은 사람들이 교육문제와 보육문제로 버거워하면서 근본적인 고민들은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응당 아이들이 좋은 점수로 좋은 학교를 가야 좋은 대학 가고 사회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면서...

 

통조림공장의 재료들이 콘베이어 벨트 위에서 가공을 기다리듯이, 아이들은 찍어져 나온다.

유아 때는 영어천재, 수학천재, 과학영재를 확인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는 특수목적고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해...

대학에 진학하면? 등록금에 허덕이다 청년백수 신세로...

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지만 사회의 이런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애기 낳기가 쉽지 않다...

 

비오는 날은 생각이 많아지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번 되돌아봤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 김대중, 슨상님과 선생님, 빨갱이와 평화주의자의 차이를 알아보니...

故 김대중 前대통령님의 업적과 공과를 내 나름의 평가로 정리를 해봐야겠다.

한 시대를 같이한 일정부분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 것 같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이나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1997년,

구조조정에 내몰린 사회를 원망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밀지도 못했던 'IMF 저주세대'라 불리던 친구들이 이제는 경력 10여년이 넘는 사회인으로 성장한 지금,

IMF의 굴욕과 함께 탄생한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 요즘 세대들은 낯설어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몸소 체험해야 했던 세대들이 이제는 자랑이나 영웅담의 형식이 아니라 차분하게 역사를 들려줘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때 왜 그래야만 했는지...

 

벌써 ‘민주주의’를 꺼내면 ‘아버지 어릴 적에는~말야’로 들리는 세대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댓글에 ‘빨갱이’, 슨상님’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후배들이 제대로 알고, 제대로 비판을 할 수 있도록 역사의 경험을 가감 없이 들려줘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내가 생각하는 DJ의 가장 큰 업적은 ‘호남의 한풀이’.

대학은사 중 호남출신으로 보수의 중심에 계신 분이 있었다.

북한학을 전공하셨는데 정보기관과 친밀하게 지내셨다.

진보진영이라면 마뜩찮아 하시던 분이 어느 날 고백하시듯이 말씀하신다.

대학시절 하숙집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1950~60년대 대학가 하숙집에서는 전라도 출신을 가려 받았단다...

보수의 중심에 계신분이 이렇게 차별 받은 것을 기억할 정도이니, 호남인들의 가슴은 그동안 얼마나 응어리져 있었을까?

사회 각 분야에서 알게 모르게 집단 따돌림을 당한 호남인들의 한(恨)은 김대중이라는 인물에게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력을 통한 한풀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호남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고려 왕건의 훈요십조 이래 조선,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을 누려보지 못한 소수인구의 땅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사람이 김대중이었다.

눈물로 고대하던 희망이 이루어진 1997년 대선승리!

평화적 정권교체의 의미도 크지만 나는 보았다. 호남사람들의 한이 풀어지던 모습을...

그러한 한이 풀어지면서 호남사람들은 정권재창출을 위해 영남사람 노무현을 전략적 선택하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둘째'한반도 평화'.

초등학교 때 반공포스터그리기, 반공웅변대회가 많았다. 북한을 이리나 늑대, 손톱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포악한 무리들로 묘사해야했다. 그래야 상을 주니까...

중ㆍ고등학교 때는 여의도 광장에 무수히 불려 나와야 했다.

북한을 타도하는 궐기대회가 걸핏하면 여의도에서 열렸다.

서울의 중고등학생이 다모여 반공을 외쳐야 했다.

북한관련 심각한 뉴스나 휴전선에서 총격전이라도 벌어지면 아수라장이었다.

동네시장에서는 라면과 생필품을 사재기하느라 난리였다.

전쟁이 나면 한 달은 버텨야한다고 박스 채 구입들을 했다.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다.

깜짝쇼를 즐겨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다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되자 남북문제에 관해서 극보수로 돌아선다.

 

셋째'민주주의의 가치' 지켜낸 것이다.

식민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군부쿠데타는 유행이었다. 후진국에서 선진 행정체계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계층이 군부엘리트 계층이었으니까...여기에다 무력과 조직력까지 갖고 있었으니 분열된 민주진영을 무력화하기는 쉬었을 것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유행했다.

이러한 군부세력에 맞서 싸워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투쟁해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인권과 여성평등에 기여한 공로 또한 크다.

 

넷째'화해와 용서'.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사람이 살다보면 말다툼이나, 목소리만 높아져도 쉽게 사이가 틀어지는데, 하물며 본인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먼저 화해와 용서를 하였다.

72년 5월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72년 10월 유신으로 일본에 망명해있다 73년 백주대낮 도쿄시내 한복판 호텔에서 납치당하여 바다에 수장될 뻔 했던 위기를 맞고, 장남 김홍일 또한 DJ납치사건의 영향으로 홧병을 얻어 돌아가신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자 모두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는 불행을 겪는다.

80년에는 광주항쟁을 사주했다하여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다.

이러한 엄청난 일들을 그는 다 용서한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허가하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에 대한 정치보복을 중단시킨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겠지만 정권이 바뀌면, 권력기관들은 알아서 前정권에 대한 보복을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중단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없으면 힘들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정권 출범 초기에는 정권을 안정시키는 지름길로 보이고, 그 유혹을 떨쳐버리기는 어느 누구도 쉽지 않다.

 

다섯째실질적 복지체계 시작이다.

‘생산적복지’ 일컬어지는 복지전달체계의 시작은 개발과 성장위주로 치닫던 한국사회의 모순을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시작으로 절대빈곤층을 구제하고, 흩어져있던 의료보험을 통합하여 건강보험의 기틀을 잡고, 국민연금을 시작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한 의약분업을 실시한다.

의료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의료보험 개혁은 오바마정권의 핵심 공약이다. 그러나 복잡한 보험체계는 개혁을 어렵게 하고, 지금도 지지부진해서 욕을 먹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미국처럼 의료민영화를 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아파도 치료를 못 받는 나라제도를 따라가겠다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다른 굵직한 업적들이 많아 가려지는 측면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복지 분야의 업적은 상당하다.

 

여섯째, '평화적 정권교체' '정권재창출'이다.

비록 보수 세력의 원조인 김종필, 박태준과 손잡은 DJP연합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지만 진보진영으로의 정권교체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앞서 언급했지만 부산사람인 노무현을 통한 '정권재창출'은 개혁의 지속을 위한 정치9단다운 중요한 결정이었다.

 

DJ의 여러 업적 중 이상 여섯 가지 정도를 나는 손꼽고 싶다.

 

‘슨상님’이라는 비아냥거림이나 ‘빨갱이’라는 허접한 비난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과오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호남한풀이에 대비되는 '지역주의'에 전착한 제왕적 권위주의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권위는 ‘막대기를 공천해도 당선’된다는 말을 낳으며 권력화 된다.

물론 변화를 위해 이른바 ‘새로운 피’라 불리는 인물들을 제일 많이 수혈하기는 했다. 그 당시 영입된 인물들이 이제는 야당의 거물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야당분열과 창당과정은 호남이라는 기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또한 30년 야당인사들의 누적은 집권이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측근비리, 아들비리의 원인이 된다.

 

둘째, 분열의 빌미 제공이다.

87년 후보단일화의 실패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박정희 정권에서 부산경남은 중요한 야당 거점이었다. 그러한 지역이 지금은 보수의 원조역할을 하고 있다.

79년 부마(부산, 마산을 일컬음)항쟁은 유신독재의 종말을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말이다...

DJ 역시 ‘그때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지만 너무 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때 당시 후보단일화를 통해 민주진영이 정권을 잡았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상황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었지만, 당을 몇 번이나 깨고 창당하는 과정은 의회주의자, 정당주의자로서의 면모와 맞지 않는다. 창당전문가라는 비난 역시 피할 길이 없다.

 

셋째, 비리통제의 실패다.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옷로비 사건’으로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1년 동안이나 시달렸으면서 비리를 관리하지 못했다.

측근과 아들비리 이후 보수진영에 비해 갖고 있던 도덕적 우월성을 잃어버리면서 정권은 중반 이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측근과 아들들의 비리는 지도층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시대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썩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위의 3가지 과오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붓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남북평화의 시작인 햇볕정책은 ‘빨갱이’, ‘퍼주기’로 비난받고...

 

네티즌 댓글 ‘슨상님’, ‘빨갱이’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인터넷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악플은 사라지고 토론은 늘어났으면 한다.

 

존경의 의미인 선생님을 왜곡할 필요는 없다.

우리사회는 좀 더 많은 선생님을 필요로 한다.

 

많은 업적을 남기고 떠나신 전직대통령에게 ‘슨상님’ 보다는 ‘선생님’, ‘빨갱이’ 보다는 ‘평화주의자’가 낫지 않겠는가?

 

  조국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김대중선생님을 추모하며...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 사진으로 돌아본 DJ의 일생 4 (미공개분 포함)

이어서 사진정리를 계속합니다...

 

35...1997년 7월 25일 경북농업 경연인 대회 영덕 고래불해수욕장

 

36...1997년 9월 5일 남대문시장에서 '체험 삶의 현장'

 

37...1997년 10월 일산자택 서재에서 이희호 여사와의 다정한 한때

 

38...1997년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박웃음

 

39...1997년 11월 21일 마이클잭슨과 함께

 

40...1998년 1월 23일 IMF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행사

 

41...1998년 2월 25일 첫 평화적 정권교체 15대 대통령 취임식

 

42...1998년 2월 25일 첫 평화적 정권교체 15대 대통령 취임식

 

43...1999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날 미국판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수상

 

44...2000년 6월 13일 남북정성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직접 영접을 나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 만남

 

45...200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수상

 

46...2000년 12월 11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축하음악회에서 수상자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진으로 돌아본 DJ의 일생 3 (미공개분 포함)

이어서 사진정리를 계속합니다...

 

 

23...1987년 11월 2일 13대 대선 당시 여의도 유세 후 거리행진

 

24...1987년 11월 20일 13대 대선 당시 문익환 선생과의 단일후보 범국민대회

 

25...1987년 13대 대선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모습

 

26...1987년 11월 13대 대선 지역유세 현장에서

 

27...1989년 8월 4일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 관련 불고지죄 혐의 조사 후 중부서에서 나오는 모습

 

28...1989년 8월 4일 새벽 3시 중부서에 강제 구인되어 14시간의 수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광장에 가득 모여 기다리던 시민,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29...1990년 10월 9일 내각제개헌 음모포기, 지자제 전면실시 등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단식농성 중

 

30...1992년 7월 26일 손주들과 즐거운 한때

 

31...1992년 11월 15일 동교동 자택에서 손주들과 가벼운 운동

 

32...1992년 11월 15일 동교동 자택에서 정원을 가꾸며

 

33...1992년 넥타이를 손수 골라주는 이희호 여사

 

34...1992년 12월 14대 대선 당시 여의도 유세

▶◀ 사진으로 돌아본 DJ의 일생 2 (미공개분 포함)

이어서 사진정리를 계속합니다...

 

12...1980년 8월 14일 오전10시 수인번호'201'을 가슴에 붙이고 '5.17'밤 중정에 연행된 후 90일만에 처음 공개석상에 나타난 모습.'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으로 사형선고

 

13...1980년 사형언도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서신

 

14...1980년 5월 28일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언도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어 허용된 한달에 한장의 엽서

 

15...1981년 1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던 시절의 옥중독서

 

16...1985년 2월 2년 1개월의 미국망명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앞서 교민들이 환송회를 겸한 귀국대강연회를 열고 그의 건승을 기원하고 있다

 

17...1985년 3월 6일 전면해금 조치로 4년 만에 동교동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정치인이 서로 손을 잡은 채 활짝 웃고 있다

 

18...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의 연설

 

19...1987년 가택연금 당시 담장너머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벽속에 갇힌 민주주의 지도자'

 

20...1987년 외부와의 출입과 연락이 완전 봉쇄된 동교동 자택 지붕 위에서 연금해제요구 시위를 벌이는 동교동 비서진(왼쪽 남궁진, 오른쪽 김옥두)

 

21...1987년 7월13일 양심수석방 결의대회를 마친 후 거리행진

 

22...1987년 9월8일 광주망월동묘역에서 희생자가족과 오열

▶◀ 사진으로 돌아본 DJ의 일생 1 (미공개분 포함)

이 나라의 큰 별이 졌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는 누구나 외치는 소리지만 온몸으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헌신하신 故 김대중 前대통령님의 삼가 명복을 기원합니다.

 

님의 업적과 공과는 제 나름의 입장에서 따로 정리를 한번 해야 되겠습니다.

 

우선 사진으로 DJ의 일생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동안 언론에 나온 사진도 있고, 미공개분도 있습니다.

민주당 사진자료를 인용했습니다.

 

1...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생가

 

2...1943년 목포상고 재학시절

 

 3...1967년 7대 국회의원 시절 목포에서 의정보고대회를 열고 있는 김대중의원

 

4...1970년 11월 14일 서울 효창공원 유세'4대국 안전보장론' 등 참신한 공약으로 구름같은 청중을 사로잡다

 

 5...1971년 4월 7대 대통령선거포스터

 

6...1972년 6월 4일 신민당 의원들의 비상사태 철회요구시위(국회앞)

 

7...1973년 8월 13일 동경 납치사건 직후 와병 중인 자택에서 박순천 여사의 위문을 받고 있다

 

8...1975년 이희호여사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의 석방촉구시위

 

9...1976년 3월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정일형 박사 등과 함께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10...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고 있다

 

11...1979년의 어느 날 장기 불법자택연금 263일 째를 표시하는 263개의 X표가 달력에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