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 陶淵明(도연명)

 

人生無根蔕(인생무근체)

인생은 뿌리없이 떠다니는 것

 

飄如陌上塵(표여맥상진)

길 위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네

 

分散逐風轉(분산축풍전)

나뉘고 흩어져 바람 따라 옮겨 다니니

 

此已非常身(차이비상신)

이것은 이미 항상 있는 몸이 아니로구나.

 

落地爲兄弟(낙지위형제)

세상에 나와 형제가 되었으니

 

何必骨肉親(하필골육친)

어찌 반드시 혈육만을 친할까?

 

得歡當作樂(득환당작락)

기쁨을 얻었으면 마땅히 즐거워하고

 

斗酒聚比隣(두주취비린)

한 말 술이라도 이웃과 마셔야지

 

盛年不重來(성년불중래)

젊은 때는 다시 오지 아니하고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하루에 새벽은 거듭되지 않는다네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라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歲: 해 세. 月: 달 월. 不: 아니 불. 待: 기다릴 대. 人: 사람 인)

 

세월(歲月)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월(歲月)을 아껴 쓰라는 의미(意味)이다.

 

이 성어는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잡시(雜詩) 12수 가운데 첫 번째 시에 나오는 말이다.

도연명시집, 고문진보 전집에 실려있다.

‘잡시’중 특히 성년부중래, 급시당면려, 일일난재신, 세월부대인은 한국의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실려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로도 인용된다.

 

 

<< 참조 >>

도연명 (陶淵明 365∼427)

중국 동진(東晉)·송(宋)나라의 시인. 장시성[江西省(강서성)] 심양 자상(紫桑) 출생.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은 자(字). 호(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

동진왕조의 초창기에 큰 공을 세운 군벌의 거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고 하며, 외조부 맹가(孟嘉)는 장군 환온(桓溫)의 부하이며 풍류를 즐긴 인물로 알려졌다.

 

하급귀족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어서부터 면학에 힘쓰며 입신의 뜻을 품었으나 29세에 처음으로 주(州)의 좨주(祭酒;학사담당)가 되어 사관(仕官)하였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이어 주부(主簿;비서담당)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한때 고향으로 돌아갔다.

35세 때쯤, 진군(鎭軍) 장군의 참군(參軍;참모)이 되어 민란토벌에 종군하였고, 또 형주(荊州)의 군벌 환현(桓玄)의 막부에도 봉직했다.

최후에 고향에서 머지않은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80여 일 근무하다 사임하여 햇수로 13년에 걸친 관료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 때 나이 41세였다.

 

<내 어찌 5두미(斗米;현령의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대할소냐>라고, 현의 사찰(査察)로 온 군(郡)의 말직(末職;군 밑에 현이 있음)에게 굽신거릴 수 있겠는가 하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현령의 직을 팽개쳤다.

그리고는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전반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려냈고, 후반에는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 묘사했다.

<돌아가련다 이제.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한다.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명구로 시작되고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 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흐르는 걸작이다. 관직을 내놓고 은일생활(隱逸生活)을 하겠다는 선언의 뜻이 담겼다.

 

이후 63세로 죽을 때까지 주로 심양 근처에서 지내면서 은사로 처세하여 명성을 얻었다. 50세가 지날 무렵, 조정으로부터 은사에게 명목만으로 주어지는 저작좌랑(著作佐郞)의 벼슬이 제수되었다.

 

도연명의 시는 오늘날, 사언시(四言詩) 9수, 오언시 12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을 노래한 것, 유유자적한 심경을 토로한 것, 주·현의 관리들과의 증답시(贈答詩), 영사(詠史), 의고시(擬古詩) 등이 주가 된다.

한아(閑雅)한 정취 가운데서도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어 있어 송나라 소동파(蘇東坡)는 이것을 평해서 <그의 시는 질(質;순박함)하나 실제는 기(綺;아름다움)하며, 구(파리함)하나 실제는 유(살찜)하다>고 하였다.

또 그는 천성이 술을 좋아해서, 그의 시는 <편편(篇篇) 술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도 가을밤의 지루함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마구 썼다고 하는 <음주(飮酒)>라고 제목 붙인 20수의 연작은 연명의 독특한 시경(詩境)을 남김없이 전한다.

 

당(唐)나라 때에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 등 자연파시인들의 찬탄을 받았고, 송나라 소동파의 상찬(賞讚)에 이르러서, 육조제일(六朝第一)일 뿐 아니라 고금독보(古今獨步)하는 시인이란 명성을 얻었다.

 

시 외에도 부(賦)에는 《한정부(閑情賦)》

산문에는 《자제문(自祭文)》 《자엄(子儼) 등에 주는 소(疏)》 등,

잡전(雜傳)에는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오효전(五孝傳)》 《사팔목(四八目)》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오류선생전》이 유명하다. 《도정절집(陶靖節集)》 10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절(靖節).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두 개의 9가 겹쳐져서 “중구(重九)”라고 부른다. 또한 중국 고대에는 6을

음수로 여기고 9를 양수로 여겼기 때문에 중구(重九)를 “중양(重陽)”이라 불렀다.

중양절의 최초의 기원은 한(漢)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궁에 매년 9월 9일이면 산수유나무를 두르고 쑥떡을 먹으며 국화주를 마심으로써 장수를 기원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습속으로 민간에 전해졌다.

중양절에는 국화를 감상하고 국화주를 마시는데 이는 도연명에서 기원한다. 도연명은 은거와 시, 술로 이름을 떨쳤는데 국화를 사랑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훗날 사람들이 그를 본받아 중양절에 국화를 감상하는 풍속이 생겼다. 예전에는 많은 사대부가 국화를 감상하고 연회를 즐김으로써 도연명에 좀 더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댓글 8개:

  1. 오래간만의 포스팅이 정말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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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오.가

    가슴을 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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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귀거래사는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네요.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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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블링크 - 2009/11/03 15:24
    한동안 일이 있어 글을 못올렸습니다...감사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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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감자꿈 - 2009/11/03 16:03
    자연으로 돌아간 도연명의 말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자기가 이루지 못한 한이랄까...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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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Phoebe - 2009/11/03 16:05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아직도 기억하시다니 대단합니다...홍콩은 신종플루에 안전한가요? 서울은 비상입니다. 조심하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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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비밀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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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Anonymous - 2009/11/03 22:22
    늘 왕성하신 활동에 감탄하고 있습니다...건강하십시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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